2009년 5월 23일 토요일

미국사 30- 미국의 산업 혁명

*아래의 글은 제가 직접 작성했습니다. 나중에 책으로 출판될 수도 있으니, 복제는 물론 다른 사이트에 허락 없이 퍼 올리는 것을 강력하게 금합니다.

 

미국인들이 서부 지역으로 확장을 할 때 미국 동부 지역에서는 산업 혁명을 불러일으킨 많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1840년대와 1850년대는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발달이 눈에 띄게 이루어지면서 경제 성장이 빨라졌고,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이제는 말이 이끄는 마차보다는 전차가 사람들과 물건들을 먼 거리까지 수송하는 보편적인 수단이 되었다. 1844년엔 새뮤얼 모스가 전신을 발명함으로써 멀리 떨어진 곳까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 농업 기술과 제조업의 발전 (강철 제설기(steel plow), 기계화된 수확기(mechanical reaper)와 재봉틀(sewing machine) 등이 이때 발명됐다)은 미국 내에서 무역이 성행하도록 만들었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철, 총, 재봉틀, 양모, 옷, 신발, 시계, 농업 관련 장비 등이 모두 개인적인 소규모 제작에서 대량생산이 가능한 공장 생산으로 바뀌었다. 이전의 다품종 소량의 수공업 생산 형태에서 대량 생산으로 바뀐 체계는 결국 미국 산업혁명을 불러왔다. 1840년에서 1860년까지 20년 간 미국이 일으킨 경제적 성장은 유럽의 빈민들 4백만 명이 일자리를 찾아 미국으로 이민을 오도록 만들었다(당시 미국 인구는 약 2천만 명이었음). 상당수가 기아로 허덕이고 있던 아일랜드 사람들이었지만, 독일에서도 많은 수가 이민을 왔다.
1848년에는 캘리포니아 북쪽에서 금이 나온다는 소식이 미국 전역으로 퍼지자, 온 미국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태평양에 맞붙은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었다. 이곳에서 채굴한 금들은 미국 서부 지역의 경제를 활발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덕분에 태평양 해안의 여러 도시들은 인구가 급증하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동부에서 서부까지 미국 대륙을 가로로 연결하는 전선과 철도의 선로를 만드는 거대한 작업들이 계획되었다.

그렇다고 1840년대에서 1860년대의 미국 사회를 산업 사회라고 규정할 순 없다. 여전히 가장 많은 인구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국가의 주된 산업도 농업이었다. 특히 남부 지방은 완벽한 농업 사회였다. 하지만 북쪽은 농업에서 제조업으로 전환하는 뚜렷한 징후를 보이고 있었다. 결국 남과 북의 이런 산업 형태의 차이는 노예 제도와 함께 양측을 더욱 분리시키는 역할을 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1820년대 미주리가 주로 승격되면서 노예 제도를 인정하는 주와 인정하지 않는 주가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법안이 통과되고 난 후, 미주리 북쪽(36。30’ 선을 기준으로)에서는 노예 제도를 완전히 폐지시켰었다. 노예 제도 폐지를 주장하던 북측과 노예 제도의 존속을 주장하던 남측, 양쪽 다 이에 만족하진 않았지만, 일단 급한 불을 끄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멕시코로부터 엄청나게 넓은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면서 노예 제도에 대한 새로운 논쟁이 국회에서 격렬하게 시작되었다. 멕시코에게서 빼앗은 텍사스, 캘리포니아, 뉴멕시코의 영토가 36。30’ 선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법대로라면 이곳은 노예 제도가 인정이 되는 지역인데, 북쪽 주들의 국회의원들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넓은 땅이 노예 제도가 인정이 된다면 남쪽 세력이 크게 확장이 되는 것이라 북쪽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런 와중에 1854년에 노예 제도 논쟁에 더 크게 부채질을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스티븐 더글러스(Stephen Douglas)라는 일리노이 주 민주당 상원 의원이 캔자스와 네브래스카의 영토를 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법안을 제안했다. 더글러스는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야망이 큰 인물이었고, 새로 얻은 영토에서도 민주당이 영향력을 발휘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36。30’ 선 위에 있기 때문에 사실 노예 제도를 인정하지 않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던 캔자스와 네브래스카 영토의 노예 제도를 투표를 통해 정하자고 제안했다.
북쪽 출신인 더글라스로서는 남쪽 지역 의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취한 정치적인 행동이었다. 동시에 더글러스는 캔자스와 네브래스카 지역을 빨리 발전시켜 자신의 주에서 가장 큰 도시인 시카고에서 태평양까지의 철도를 건설해 상업을 확대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예 제도를 두고 발생한 갈등으로 인해 그의 철도 건설 계획 등은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남쪽 의원들은 미주리 주 승격 시 생긴 법안을 아예 폐지해야 한다고 들고 일어섰다. 계산이 빗나가 버린 더글러스는 남쪽 의원들에게 오히려 비난당하는 양상이 되어버렸고,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안은 국회에 상정되었다.

꼭 봐야 하는 영화 #12

Take the Money and Run
(돈을 갖고 튀어라)
1969년, 미국, 감독 우디 알렌, 각본 우디 알렌

나는 우디 알렌의 광팬이다. 지난 40년 동안 3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의 영화에서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위트와 기발함, 언어의 매력이 있다. 또한 그는 비할리우드의 대표적인 감독으로, 몇 년 전에 아카데미에서 그 에게 명예상을 수여할 때까지 할리우드에서 외면당해왔다.

그의 데뷔작이 돈을 갖고 튀어라다. 전문강도로 이름을 날리고 싶어하는 버질 스타크웰(우디 알렌이 직접 주인공 연기)은 은행털이에 나서지만 권총이란 단어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등의 실수로 결국 붙잡혀 감옥에 갇힌다. 비누를 총으로 위장해 탈옥을 감행하지만 비가 내려 비누 거품이 이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다큐멘터리 기법을 따온 이 작품은 코믹한 상황과 개그가 끊임없이 이어져 알렌 초기의 광대 영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처음 이 영화를 TV에서 접했을 때(중학생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너무 웃겨서 바닥을 굴렀던 기억이 난다.

뉴욕대 영화학과를 중퇴한 이 괴짜 뉴요커의 데뷔작은 그러나 전혀 데뷔작으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성숙되고 안정적인 코미디이다. 이 작품의 재미는, 우선적으로 그 것이 반 다큐멘터리(semi-documentary)적, 아니 가짜 다큐멘터리적인 구조라는 데 있다. 그 것은 명백히 올슨 웰즈의 (시민 케인. 1941. 영화 평론가들이 역사 상 가장 위대한 영화로 평가)에 대한 페러디이자 오마쥬이다. 또한 갱스터를 꿈꾸는 주인공의 욕망은 갱스터 느와르의 전통과 전형에 대한 위트 섞인 풍자이다.

알렌은 이 데뷔작의 첫 번째 촬영을 감옥신에서 했는데, 매우 흥분된 상태여서 면도할 때 코를 베었다고 한다. 이 영화의 교도소 장면을 보면 코베인 상처를 볼 수 있는 데, 한 번 찾아보면 어떨까? 정말 신나 게 웃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진정한 코미디 영화다. 우울할 때 정말 볼만한 영화다.

콜린박 씀.

2009년 5월 22일 금요일

미국사 29- 멕시코 전쟁

*아래의 글은 제가 직접 작성했습니다. 나중에 책으로 출판될 수도 있으니, 복제는 물론 다른 사이트에 허락 없이 퍼 올리는 것을 강력하게 금합니다.

 

멕시코와 영국은 미국의 서부로의 확장에 분노했다. 1840년대에는 서부 지역의 영토를 사이에 두고 미국과 멕시코, 영국간의 갈등이 심해졌고, 작은 전쟁들이 일어났다. 우선, 미국과 멕시코의 갈등의 가장 큰 원인은 텍사스 영토였다.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하면서 당시 스페인 소유에 있던 텍사스는 자연스럽게 멕시코의 땅이 되었다.
루이지애나 주 옆에 있는 비옥한 땅 텍사스를 소유하기를 원했던 미국은 멕시코로부터 텍사스를 사기 위해 여러 번 가격을 제안하며 팔 것을 요청했지만 멕시코에서는 계속 거절했다. 하지만, 텍사스에는 멕시코 사람들이 그다지 많이 살고 있지 않았고 미국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계속 미국 사람들이 옮겨가 정착해 살았다. 멕시코 정부에서도 1823년부터 텍사스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서 정식으로 미국인들의 이민을 허락했다. 이것은 멕시코 정부의 큰 실수였다. 싸고 비옥한 텍사스 땅이 탐난 많은 수의 미국인들이 이민을 갔고, 곧 텍사스 인구의 상당수가 미국 이민자들로 이루어졌다.

미국인 이민자 수가 늘어나자 멕시코 정부는 그제야 위협을 느꼈다. 거기에다 미국인들은 멕시코인들과 달리 카톨릭 종교를 믿지 않았고, 흑인 노예들까지 데리고 왔다. 멕시코 정부는 노예를 모두 해방해야 하고 카톨릭 종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법령을 발포했으나 미국인 이민자들이 이를 무시하자 1830년에 미국인들의 텍사스 이민을 금지하는 법을 발표했다.
그러나 멕시코 정부의 법안들은 별 효과가 없었다. 미국인들의 이민은 계속 되었다. 곧 미국인 이민자들이 대다수였던 텍사스는 멕시코로부터 독립된 정부를 세우게 해달라고 멕시코 정부에 요구했다.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1835년 텍사스 사람들은 반란을 시작했다. 지금 미국의 4번째로 가장 큰 도시인 휴스턴의 이름의 기원이 된 샘 휴스턴(Sam Houston) 장군이 이끄는 텍사스 군대는 1년 동안의 싸움 끝에 1836년 멕시코 군대를 물리치고 독립을 했다.
하지만, 새로 세워진 텍사스 공화국(Texas Republic)과 멕시코 간의 소규모 전쟁들은 양국의 경계선에서 계속 되었다. 텍사스는 싸움이 불리해질 때마다 미국 군대의 도움을 받았다.

1845년, 미국은 텍사스 영토를 합병했다. 새롭게 텍사스 땅을 차지한 미국은 뉴에세스 강(Nueces River) 지역의 땅이 텍사스 소유라고 억지를 부렸다. 텍사스 땅을 뺏겨 지금까지 이를 갈아온 멕시코는 미국과의 전쟁을 위해 군대를 모집했다. 1846년 4월, 멕시코 군대가 리오그란데 강 (Rio Grande River.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이루는 강)을 건너면서 전쟁(Mexican War)은 시작됐다.
하지만 멕시코 군대는 미국 부대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미국 군대는 텍사스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멕시코까지 쳐들어가 여러 곳에서 벌어진 전투들에서 승리했다. 1847년 9월에는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시티(Mexico City)까지 정복했다. 결국 멕시코는 미국과 수치스러운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1848년 2월에 있었던 이 협상을 통해 멕시코는 현재의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애리조나, 뉴멕시코, 콜로라도와 와이오밍까지를 망라하는 엄청난 규모의 땅을 천만 달러라는 헐값으로 미국에 넘겨야 했다. 그 땅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별로 안 사는 사막이거나 산악 지역이었지만, 사실 지금은 전 세상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들이 오는,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들(요세미티(Yosemite), 그랜드 캐년(Grand Canyon), 시에라 산맥(Sierra Mountains), 타호 호수(Lake Tahoe) 등)이다.

서부의 땅을 놓고 멕시코와 전쟁을 하던 당시 미국은 오리건 영토(지금 미국의 오리건, 워싱턴 주와 캐나다 서부의 브리티시 콜롬비아 주(British Columbia))를 사이에 두고 영국과 전쟁 직전까지 갈 정도로 갈등이 심했다. 미국은 오리건 영토 전부를 미국의 땅이라고 주장했다.
미국과의 전쟁이 있을 경우 승리할 확률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영국은 오리건 영토를 49도 선을 기준으로 나누어 북쪽은 영국, 남쪽은 미국의 영토로 만들자는 제의를 했다. 멕시코와의 전쟁 때문에 또 다른 전쟁을 피하고 싶었던 미국 국회와 포크는 영국과 합의를 함으로써 현재 미국과 캐나다의 서부 지역 경계선이 이 때 확정되었다.

미국사 28- 선택된 운명 (Manifest Destiny)

*아래의 글은 제가 직접 작성했습니다. 나중에 책으로 출판될 수도 있으니, 복제는 물론 다른 사이트에 허락 없이 퍼 올리는 것을 강력하게 금합니다.

 

그리고 잭슨 시대와 더불어 다음 대통령들의 임기 때는 노예 제도 폐지론자(abolitionist)들의 운동이 급격히 성장했다. 이 운동의 리더는 기독교 운동가인 띠오도르 웰드(Theodore Weld)였다. 오랫동안 노예 제도 폐지 운동(abolitionist movement)에 참여했던 그는 1830년대에 오하이오 주에 오벌린 대학(Oberlin College. 현재 미국 최고의 리버럴 알츠 대학 중 하나다)을 설립했고, 이 대학은 노예 제도 폐지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웰드는 인상적이고 열정적인 연설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노예 폐지 운동을 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미국의 북쪽 지역에는 18세기부터 노예 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과 단체들이 있었고, 북부 주 국회의원들 상당수가 노예 폐지를 원했다. 하지만, 웰드와 매사추세츠 언론인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William Lloyd Garrison), 그리고 한 때 노예였던 프래드릭 더글라스(Frederick Douglass) 같은 노예 폐지론자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전까지는 폐지 운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웰드와 개리슨, 더글라스의 노력들로 인해 매사추세츠와 뉴욕 주, 그리고 오하이오 주 북부는 노예폐지 운동의 중심 지역이 되었다. 17세기 말에 처음으로 미국에 도착했을 때부터 노예제도 폐지를 외쳤던 펜실베니아의 퀘이커들도 앞장서서 폐지 운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뉴잉글랜드와 펜실베니아 등의 북부 지역 모두가 노예 폐지 운동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노예폐지 운동은 북부의 큰 도시들에서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북부 사람들 대부분은 흑인들을 백인들에 비해 훨씬 더 열등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보스턴은 노예 폐지론자들에게 무척 적대적인 곳이었다. 도시일수록 노동자들이 많았는데, 노예 신분에서 풀려난 흑인들이 큰 도시들로 이주해 자신들의 일자리를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흑인과 백인은 평등하다는 극단적 노예 폐지론자들의 주장에 말도 안 된다고 분노하는 백인들도 많았다. 노예 폐지 운동이 효과적으로 잘 받아들여진 곳은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많았던 북부의 시골 마을들이었다.

노예 폐지론자들은 열정을 가지고 노력했지만, 큰 실효는 얻지 못했고, 오히려 남쪽에는 악영향만 가져다주었다. 북부 지역의 노예 폐지 운동에 위협을 느낀 남부 사람들은 더욱 더 철저하게 노예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 뭉쳤다. 사실 남부에서는 노예 폐지에 관한 말 한마디만 나와도 총 맞을 지경이라 노예 폐지론자들이 운동은 고사하고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노예 폐지 운동은 북쪽의 지식인들에게 남쪽에서 흑인들이 얼마나 힘든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리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리고 노예 제도가 미국의 민주주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 데도 어느 정도 성공했다.

잭슨 시대와 1830년대 말은 민주주의의 발전, 원주민들의 강제 이주, 노예 제도를 둘러싼 논쟁, 본격적인 양당 체계, 교통수단과 기술의 발전 등,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 중 하나였다. 그 시대를 중요하게 만든 또 하나의 움직임은 바로 미국인들의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의 이주였다.
미시시피 강과 애팔래치아 지역의 인구가 급격히 늘어남으로써 1830년대부터 보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땅을 찾아 더욱 더 서부로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10번째 대통령인 제임스 포크(James Polk)가 1844년에 선출되었을 때, 미국인들은 미국의 경계를 지나 태평양을 마주 보는 땅까지 진출한 상황이었다. 당시에는 정확한 경계선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영국과 멕시코의 땅들(지금 미국의 텍사스를 포함한 남서부, 로키 산맥 지역, 그리고 태평양 해안 주들)에까지 옮겨가 정착해 있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비옥한 땅과 경제적 기회를 찾아 이주했지만, 지금의 유타 지역에 정착한 몰몬교도들은 종교적인 자유를 찾아 길을 떠난 경우였다. 미국인들이 서쪽으로 계속 퍼지면서 국가주의자들과 일부 정치인들이 미국 정착민들이 넓힌 지역들까지 미국의 경계에 포함해 합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어떤 이들은 북 아메리카 대륙 전체가 모두 미국의 땅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가 고조되어 갈 때 언론인 존 오설리번(John O'Sullivan)은 1845년에 “북 아메리카 영토가 미국의 땅이 되는 것은 신이 미국인들에게 내린 선택된 운명(Manifest Destiny)이다”라고 신문에 썼다.


그가 쓴 글에서 선택된 운명이라는 표현에는 세 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첫째는 신이 미국의 세력 확장을 편들고 있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미국의 확장은 민주주의 정신을 퍼뜨리기 위한 것이란 대의명분이었고, 마지막은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새롭게 개척할 땅이 있어야 미국이 평화로울 수 있을 것이란 의미였다.

 

꼭 봐야 하는 영화 #11

Khane-ye Doust Kodjast?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1987년,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각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오늘 광화문의 씨네 큐브에서 루마니아 감독 크리스티안 문주의 <4개월, 3주… 그리고 2일> 영화를 봤다. 낙태금지법이 시행되던 루마니아의 80년대, 은밀하게 낙태를 하기 위해 두 여성이 겪는 힘든 하루를 담은 얘기다. 모든 장면을 롱 테이크나 핸드헬드로 찍었기 때문에 영상 적으로 보기가 쉽지는 않았다. 주제 역시 무척 무거웠다. 감독은 극도의 리얼리즘을 통해 당시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독제 사회의 억압과 인간성의 근원을 묻는다. 이 영화에서 임신중절의 장본인은 가비타라는 여자이지만 영화를 이끌어가는 건 오틸리아다. 은밀하게 낙태를 하려고 하는 친구를 위해서 무모할 정도로 자신을 내던지는 그녀의 행동에 대해서 영화를 보는 내내 궁금해 했다. 친구를 위해서 정말 저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나는 친구를 위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영화가 끝나고 친구와 그 점에 대해서 논할 때까지 의문이 남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녀의 행동은 우정이라기보다는 당시의 독제 세력에 대한 반항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위의 문주 감독처럼 극도의 리얼리즘 영화를 다 롱 테이크로 만들어내는 이란 감독이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는 스텍타클도, 액션도, 그리고 계산된 드라마나, 코미디 로맨스도 없다. 너무나 단순한 스토리와 평온한 해결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영화는 끈임 없이 보는 관객을 감동시킨다. 1940년 생인 키아로스타미는 이란 테헤란 출신으로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뒤, 영화 타이틀 디자인과 CF제작에 참여했다. 70년부터 장, 단편의 다큐멘타리와 극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이 어린이를 소재로 하고 있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역시 어린이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소년 아마드는 같은 반 친구 나마자데의 공책을 잘못 가져온다. 낮에 학교에서 한 번 더 숙제를 안해오면 퇴학시키겠다고 나마자데에게 선생님이 말한 것을 기억하는 아마드는 공책을 돌려주기 위해 이웃 마을 포쉬테에 살고 있는 나마자데의 집을 찾아 간다. 그러나 누구도 나마자데의 집을 알고 있지 못한다. 오히려 아마드에게 설교만을 늘어놓거나 아예 그를 무시해버리는 어른들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다. 헤메던 아마드는 자신의 마을로 돌아오다가 다시 나마자데의 집을 찾으러간다. 아마드는 친구의 아버지일지 모른다고 생각되는 한 기술자를 따라가지만 중간에 놓치고 만다. 아마드는 밤이 깊어져서야 창문짜는 노인의 도움을 받아 겨우 나마자데의 집에 도착한다. 그러나 친구의 공책을 전해주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결국 아마드는 자신의 숙제와 나마자데의 숙제를 모두 해간다.



다음날 아침, 아마드의 자리는 아직 비어있고 나마자데는 숙제를 다른 종이에 해온다. 지각한 아마드가 학교에 도착하고 나마자데의 옆자리에 앉아서 그에게 숙제 공책을 밀어준다. 키아로스타미는 직업배우가 아닌, 실제로 영화가 촬영되는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작업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마치 KBS-TV의 (인간극장) 프로그램을 보는 기분이 난다. 그는 아마드 역을 맡은 바벡 아마드 푸어로부터 집요하면서도 열정적인 연기를 이끌어냈고, 그러한 연기는 롱 테이크와 팁 포커스의 군더더기 없는 화면과 어울어져 우리에게 한편의 영화를 펼쳐보인다. 그러나 그 동화 속엔 꿈과 환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초등교육과 가사노동을 병행해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현실 속의 어른들은 그들의 질문을 알아들을 수 없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른들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동시에 한편의 우화가 되는 것이다. 내 인상 최고의 감동 영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 3월1일부터 13일까지 서울 아트시네마에서 내가 얼마 전에 소개했던 장 르느와르 특별전을 한다. 프랑스 영화의 아버지 르느와르의 영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이니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콜린박 씀.

2009년 5월 21일 목요일

미국사 27- 잭슨 시대의 모순

*아래의 글은 제가 직접 작성했습니다. 나중에 책으로 출판될 수도 있으니, 복제는 물론 다른 사이트에 허락 없이 퍼 올리는 것을 강력하게 금합니다.

 

미국 국민들이 이렇게 민주주의를 만끽하고 있었던 잭슨 시대는 원주민들에게는 가장 끔찍한 시기였다. 당시 미국 동남부 주들(사우스캐롤라이나,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 플로리다, 조지아, 앨라배마, 미시시피)에는 원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지역에 살고 있는 백인들은 원주민들을 아직 개척되지 않아 살기 힘든 서부 지역(지금의 서부 아칸소와 오클라호마 지역)으로 몰아내기를 원했다. 원주민들을 쫓아낸 곳에 자신들이 들어가 살 욕심이었다.
남부 출신이었고, 젊은 시절 직접 원주민들과 싸웠던 경험이 있는 잭슨은 수천 년 동안 정착해서 살아온 동남부의 원주민들을 모두 미개척된 서부로 쫓아내는 법안을 1830년에 국회에 제안했다. 북부 의원들은 이 법안에 반대했지만, 원주민들이 없어지면 가장 이득을 볼 남부와 서부의 의원들이 찬성했기 때문에 결국 국회를 통과하여 법이 되었다.

플로리다의 세미놀(Seminole) 부족, 조지아와 앨라배마의 크릭(Creek) 부족과 동남부 여러 지역에 살던 체로키(Cherokee)부족, 미시시피의 촉타오(Choctaw)와 칙카소(Chickasaw) 부족 원주민들은 모두 강제로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나 사람이 살기 힘든 낯선 황무지로 보내어졌다.
체로키 부족은 그 동안 자신들의 사회를 현대적으로 바꾸어 가면서까지 자신들의 땅을 뺏기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했었다. 그래서 서부로 쫓겨 가는 것에 저항하며 자신들의 땅을 지켰지만, 1838년 연방 군대는 이주하지 않은 체로키 사람들을 잡아다 강제로 지금의 오클라호마로 끌고 갔다. 갖은 악조건에서 먼 거리를 가는 도중, 아이들과 여성을 비롯한 많은 원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눈물의 행진(Trail of Tears)이라고 불리었던 이 사건은 아직도 미국 역사에 부끄러운 행적으로 남아 있고, 지금의 원주민들에게는 절대 잊을 수 없는 비극의 역사이다.
잭슨 시대의 민주주의에는 이런 모순적인 어두운 면이 있었다. 잭슨이 그렇게 많은 업적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대통령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데에는 바로 원주민에게 행한 끔찍한 사건의 영향이 크다.

잭슨이 대통령에서 물러날 때쯤 미국에는 잭슨을 따르는 이들이 만든 민주당(Democratic Party)과 야당인 휘그당으로 양당 체계가 자리 잡혀 있었다. 현재 미국은 민주당과 공화당의 양당 체계인데, 이 양당 체계가 160년 전인 이때부터 변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휘그당과 민주당의 싸움은 1836년과 1840년 대통령 선거에서 본격화되었다. 1700년대 말과 1800년대 초에 있었던 공화당과 연방당의 양당 경쟁과는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공화당과 연방당은 단지 국회에서 정치인들간의 분쟁이었을 뿐, 일반 국민들은 별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민주당과 휘그당에 이르러서는 각 당이 추구하는 사상이 뚜렷하게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국민들은 큰 관심을 가졌고, 이제 대통령 선거인단들도 국민들이 투표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큰 관심을 가지고 자신이 지지할 당을 선택했다.

민주당은 정부가 국가 경제와 국민들에게 최소한의 간섭을 해야 한다는 사상을 추구했다(아이러니컬하게도 현재의 민주당은 정반대의 사상을 갖고 있다). 휘그당은 정부가 간섭을 해야 경제가 발전하고 산업이 발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특히 정통파에 속하는 휘그당 사람들은 노동자들보다는 기업인들에게 호의적인 정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현재 미국에서는 어떤 사람의 사상을 알고 싶으면 그 사람이 민주당과 공화당 중 어느 당에 속해 있는지를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사람들도 지금만큼은 아니지만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민주당은 주로 노동자들, 가난한 농부들, 이민자들, 카톨릭과 무신론자들, 그리고 중소기업인들이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고, 휘그당은 부자들, 기업인들, 무역과 도매상인들, 정통 신교도들이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잭슨 시대와 그 이후 시대의 중요한 또 하나의 발전은 무료 공립학교의 설립이었다. 무료 공립학교를 많이 만든 이유는 아이들이 공부를 하거나 기술을 배워야 나라가 발전할 수 있고 정부에서 인력이 부족한 이유로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의 공립학교는 학문적인 면보다는 기술의 습득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의 윤리 교육에 치중했다.
잭슨 시대 이전 학교 교육은 부자들이 자녀들을 사립학교에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잭슨 시대부터는 무료 공립학교를 통해 동부의 큰 도시에 모여 살았던 노동자 계급의 자녀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아일랜드 등 유럽에서 온 가난한 이민자들의 자녀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런 교육 정책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미국 내에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간의 공백을 줄여줄 수 있었고, 사회의 여러 모습들을 많이 변화시켰다.

콜린박 씀.

미국사 26- 잭슨 시대,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다

*아래의 글은 제가 직접 작성했습니다. 나중에 책으로 출판될 수도 있으니, 복제는 물론 다른 사이트에 허락 없이 퍼 올리는 것을 강력하게 금합니다.

 

라틴 아메리카 나라들의 독립을 인정하는 것은 유럽 강국들의 힘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던 러시아가 지금의 미국 북서부 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먼로 정부는 또 다른 외교적 문제에 부닥치게 되었다. 현재의 워싱턴 주, 오리건, 서부 캐나다 등의 태평양 지역의 땅은 당시 미국과 영국이 서로 자기 땅이라고 주장을 하던 곳인데, 이곳까지 러시아가 진출한 것이었다.
그곳은 아직 미국인들이 대규모로 정착하여 마을을 이룬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러시아 인들이 몰려와 장악하려 하자 미국은 땅을 잃어버릴 위협을 느꼈다. 미국에게는 다행히도 러시아가 영국과 미국의 협박에 밀려 서부 지역에 대한 개척 의지를 굽히는 바람에 큰 싸움 없이 문제는 해결되었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이 정착하여 마을을 만들었던 흔적이 아직도 북부 캘리포니아와 오리건 지역에 남아 있어, 짧은 기간의 체류였지만 북아메리카에서 러시아의 자취를 볼 수 있다.

이런 급격한 주변 정세의 변화는 먼로로 하여금 1823년 12월에 먼로주의(Monroe Doctrine)를 발표하도록 만들었다. 먼로주의는 50년 전 제퍼슨이 썼던 독립 선언문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 원칙이 되었다.
먼로주의의 가장 중심된 사상은 북, 중, 남아메리카 대륙과 근처 섬들까지 포함한 지역에서는 더 이상 유럽의 식민주의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신 미국은 유럽 내의 일이나 아메리카 대륙을 제외한 유럽의 전쟁 등에는 전혀 간섭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유럽은 먼로주의 발표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미국은 자국의 힘을 유럽에 과시한다는 느낌을 가졌다.
먼로의 1817년에서 1824년까지의 8년 간 지배는 여러 면에서 성공적으로 끝났다. 노예 제도에 대한 논쟁은 계속 있었지만, 미국인들은 유럽 나라들과의 관계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미국 영토는 계속 넓어졌고 정치적, 경제적으로 발전 하고 있었다.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시장들이 만들어졌고, 원재료를 가공하는 기술들이 발달하면서 산업혁명의 싹이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의 이런 발전은 1828년에 앤드류 잭슨이 7번째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부터 전성기를 맞이했다. 잭슨이 유명해진 계기는 "1812년 전쟁"이었다. 1814년 12월 말에 영국과 평화 협상이 이루어졌는데, 당시의 부실한 교통수단과 미국의 광대한 영토로 인해 이 평화 협상의 소식이 미처 전해지지 않았던 탓에 1815년 1월 영국 군대가 미국 남부에 있는 뉴올리언즈 시를 공격했다.
당시 뉴올리언즈 시를 지키고 있었던 잭슨의 미국 부대는 준비가 철저히 된 상태였기 때문에 영국 군대는 참패를 당했다. 이 승리 덕분에 잭슨은 하루아침에 영웅이 되었다.

잭슨 시대(Jacksonian Era)로 일컬어지는 1820년대와 1830년대는 미국에서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던 시대였다. 헌법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규정하고 있긴 했었지만, 잭슨 시대가 오기 전까지는 유럽의 귀족주의적인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독립 이후 차츰 줄어들기 시작한 계급간의 차별, 사회적 지위, 귀족 등의 타고난 특권들이 잭슨 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 미국의 민주주의적 정신들, 국민에 의해 국가가 운영된다는 개념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 이 때부터다.

특히 잭슨 자신이 지금까지의 대통령들과는 달리 많은 교육을 받지 못한 평민이었고, 서부의 농부들과 동부의 노동자들의 투표에 힘입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던 것이 이런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유럽인들이 잭슨 시대의 미국을 방문하고서 가장 놀랐던 점은 귀족의 특권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유럽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잭슨같이 스스로 노력해서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쉽게 권력의 핵심 지위에 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대부분의 당시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유럽인들과 다르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조금이라도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잭슨 시대의 민주주의적인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바로 국민들의 투표권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영토를 소유하고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미국은 대부분의 백인 남자들에게 투표권이 있었다(사실 미국은 유럽과 달리 상당수의 백인 남자들이 땅을 소유하고 있었음). 보통 시민들의 정치 참여도 쉽게 가능했다.
각 주 의회의 의원들과 국회의 하원 의원들(상원 의원들은 1913년에 법이 바뀌기 전까지 각 주의 의회에서 선출되었음)은 헌법이 만들어졌을 때부터 각 주의 주민들이 투표를 했었지만, 갈수록 미국에서는 공직에서 일할 인물들, 예를 들어 마을 판사도 시민들의 투표로 선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대통령을 뽑는 제도도 잭슨 시대 때 바뀌었다. 이전까지는 대통령 선거인단을 주 의회에서 뽑았었다. 그런데 1824년부터 여러 주들이 국민들이 직접 선거인단을 뽑는 방식으로 바꾸었고, 1828년 선거에는 두 주를 제외한 22개의 주들에서 국민의 투표로 선거인단을 뽑았다.
이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대통령 선거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큰 변화였고, 풀뿌리 민주주의를 향한 큰 걸음이었다. 국민들 사이에서도 자신이 대통령을 뽑을 수 있다는 의식 하에 누구에게 투표를 할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토론이 활발해져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러면서 정치적 단체도 많이 생기고 새로운 정치 문화가 발달하였다. 예를 들어 투표권을 가진 대중들에게 직접 호소하는 후보들의 연설, 토론 방식 등이 발달한 것이다. 능력 있는 정치인들이 바로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여 새로운 당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미국의 초기 인물들은 정치계가 당들로 나뉘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데, 잭슨 시대의 사람들은 여러 당들이 생김으로써 서로를 견제할 수 있어 민주주의를 더 잘 반영할 수 있다고 여겼다.
야당과 여당의 개념이 생긴 것도 이때부터이다. 잭슨이 속한 민주당(Democratic Party)의 재정 정책(fiscal policy)을 반대하는 대표적인 야당인 휘그당(Whig Party. 공화당과 전 연방당 사람들로 만들어졌음)이 생긴 것이 바로 잭슨 시대 때였다.

콜린박 씀.